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후 호이파나라씨 (문단 편집) ==== 추측2. 영귀비의 황귀비 책봉, 태자문제 ==== 중국에서는 계황후 문제에 대해서 태자문제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고 여긴다. 조선의 기록에서 시위와의 불륜은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긴한다. 만약 황후가 바람을 폈다면 정말 폐출되어 죽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간에 전해지다가 이렇게 와전된 듯 싶다. 홍대용과 박지원의 기록에서 한쪽은 귀비, 한쪽은 용비를 지목한 것으로 보아 후궁간의 암투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시 후궁의 쟁패는 훗날 [[효의순황후]]로 추존되는 영귀비 위씨였다. 영귀비는 후궁이 된 이후로 연달아 4남 2녀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 사실 1759년에 임신을 한 번 했으나 유산했다. 즉, 총 7번의 임신을 했으며, 첫 임신부터 유산한 아이까지 연속 임신이었다. 당시 영귀비가 얼마나 총애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중국 측의 의견 중에서는 건륭 30년에 [[건륭제]]가 당시 영귀비였던 위씨를 황귀비로 올려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건륭제 시절을 다룬 드라마 [[연희공략]]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청나라는 죽기 직전의 아픈 귀비를 위로해주는 목적으로 황귀비로 올리거나 황후가 공석일 때 황귀비를 올렸다. 사실상 황후가 멀쩡히 살아있을 때에 비빈을 황귀비로 올린 사례는 없다시피 했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젊고 자식도 없던 [[효헌단경황후|동악비]]를 [[순치제]]가 황귀비로 책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순치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악비였기에 가능했고, 이렇게 총애받던 동악비도 얼마 안가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당시 영귀비 소생의 15황자 영염(훗날의 [[가경제]])은 6세에 불과했고, 건륭제의 나이는 이미 50을 훌쩍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나이를 보면 건륭제가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거다. --유폐사건 이후 30년을 더 살지만.. 당시 사람들은 건륭제가 이렇게 장수할 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차기 황제를 누구로 고르냐가 당시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황후는 가만히 있으면 태후가 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적자가 있었으므로 태자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15황자 영염이 6세에 불과했으나 [[효현순황후]]를 뺨칠 정도로 총애받는 영귀비였기 때문에 걱정은 있었을 것이다. 이미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만 2세밖에 되지 않은 [[효현순황후]]의 아들 단혜황태자 영련을 밀지를 통해 태자로 책봉한 바 있었다. 영련이 죽은 후, [[효현순황후]]가 또 회임하여 7황자 영종을 낳자 종사를 뜻하는 "종"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기쁜 감정을 미친듯이 표출하여 사실상 "차기 황태자"로 여기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계황후가 12황자를 낳았을 때에도 축하해주고 시도 지어주었으나 [[효현순황후]]가 낳은 아들의 대우보다는 못했다. 아무리 [[효현순황후]]를 뛰어넘는 총애도, 지위도 누릴 수 없다해도 사람이라면 같은 황후의 자식인데 대우의 차이가 있으니 내면에 서러움과 야속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귀비가 총애받을 때 이미 나이가 어린 황자를 밀지로 황태자로 책봉한 사례가 있었으므로 경계를 안 할 수 없었을것이다. 또한 당시에 황위 계승에 유력한 사람이 1명 더 있었는데 유비 소생의 5황자 영기[*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소유붕]]이 맡았던 그 5황자 영기 맞다.]이다. 당시 건륭제의 1황자와 3황자는 효현순황후의 국상 중 슬퍼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건륭제에게 후계자에서 배제 당했고, 4황자와 6황자는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갔으며, 효현순황후 소생의 2, 7황자는 이미 오래 전에 요절했다. 이 상황에서 영기는 사실상 황제의 큰아들이었으며 문무에도 뛰어나서 부황인 건륭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후 영기는 형제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에 임명되었지만 공교롭게도 오래 앓아오던 부골저병때문에 계황후가 유폐되어 죽은 해에 같이 죽었다. 그래서 계황후가 남순 때, 황태자 책봉 문제와 엮여서 유폐당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청황실은 이미 오래전 [[강희제]]의 아들들이 황위를 두고 당파까지 나누며 피터지게 싸운 전례가 있고, 건륭제의 아버지이자 선대인 [[옹정제]]도 자신과 대립한 형제들을 평생 유폐시키고 괴롭힐 정도로 극혐하는 등, 후계자 문제로 많은 갈등을 앓아왔다. 이로인해 청나라의 황제들은 조정이든 후궁이든 황제 외에 제 3자가 황태자 문제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며, [[건륭제]]도 아버지를 위해서 숙부들을 풀어주긴 했으나 정사에는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등,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듯 건륭제가 후궁과 친족간에 권력투쟁을 극도로 견제한 상황에서 계황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대신을 만나서 모의를 했거나, 다른 황자들을 배제하려다가 들켰거나, 항주에서 무슨 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측의 기록이나 중국의 얘기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정확한 것은 그 시대로 타임슬립을 해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